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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들어 가리라?

【갈릴리 예수산책】 예수의 율법관 ②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들어 가리라?

 

마태복음 5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턱 막히게 한다. 너희의 의가, 즉 그리스도인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사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 때문에 은근히 눌러왔던 게 사실이다. 바리새인보다 우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정확하게 행위를 가리킨다. 율법을 잘 지키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이 말씀을 완화하거나 다른 말씀과 섞거나, 또는 애써 무시하면서 왔으나, 분명한 것은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안식일에 병도 고치고, 죄인들을 만나고, 금식은 하지 않고 포도주를 퍼마시는 것 같이 보여서 율법을 깨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율법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의 정신 속으로 더 철저히 들어가려 한다. 사실 예수님은 모세 오경을 절대로 부정하는 분이 아니셨다.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율법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드러내려고 하셨다. 칼빈은 말했다. “예수님은 새롭게 무슨 율법을 만드신 분이 아니라, 그것을 잘 해설해주신 분이다.”

 

산상수훈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말씀을 얼마나 잘 해설하고 계신지 볼 수가 있다. 유대인의 전승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애려고 다 모여들어서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을 것이고, 만일 세계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없애는 순간, 그 날이 종말이라고 가르친다. 그만큼 유대인에게 율법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나 율법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하지 않으시고, 계명을 잘 지키라고 하셨다.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따르라고 하셨다. 상대방이 지켰다고 하면, 그러면 됐다고까지 하셨다. 작은 계명에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 입장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장 훌륭한 바리새인도 모세율법의 요약판인 613가지 계명 중에 230개 정도밖에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율법을 다 지켜서 천국 간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철저한 바리새인조차도 230개밖에 못 지켰는데 어떻게 모든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을까? 당시 유대교인들 중에는 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작은 것을 무시하는 파가 있었고, 반대로 작은 것까지 지키다 큰 것을 버리는 파가 있었다. 앞의 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세례요한이고 에세네파다. 성전 예배도 안 드리고, 절기 같은 것도 지키지 않았다. 반대로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큰 것을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다. 즉 세세한 것 지키다가 큰 정신을 잃어버렸다. 정의, 인애, 사랑과 같은 큰 내용은 버리고 사소한 행위, 절차, 형식에 집착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입장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큰 것 못지않게 작은 것도 다 지켜야 한다고 선언하신다. 20절에서 “너희의 의, 즉 제자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안 된다.” 여기서 “더 낫지 못하면” 이라는 말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더 낫다, better than’,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230개를 지켰으면, 너희는 231개라도 지켜야 한다는 양적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숫자적으로 많은 양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더 낫다’ 라는 헬라어 ‘페리쉬오’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율법을 보라고 촉구하신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결과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간과했던 차원이 바로 ‘마음’이었다는 것을 간파하셨다. 계명 속에 있는 내용의 깊은 심층적인 면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토라, 즉 율법을 심층적 내면의 눈으로 볼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제부터 여섯 가지 주제를 놓고 논쟁의 장으로 끌고 가신다. 이른바 ‘안티테제’, 즉 반명제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몇 백 년 동안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들어서 배웠지만 나는 새롭게 가르친다.” 대표적으로 여섯 가지 사례를 들어보이신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악한 자’, 그리고 ‘원수와 이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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