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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복의 개념은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갈릴리 예수산책】 산상수훈 - 팔복편

 

성경에서 복의 개념은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복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이 많은 변화를 겪는다. 창세기는 원초적인 복을 말씀하고 있다. 원초적인 복이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복은 한 마디로 ‘활력’ 혹은 “생명력‘이다. 한편, 창세기는 인간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말한다. 너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 우리로 하여금 복의 통로로 삼는다는 말씀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복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복의 근원이다.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하나님의 복은 4복이다. 땅의 복, 자식의 복, 명예의 복, 인복. 이 네 가지 복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민족에게는 오복이라는 것이 있다.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오래 살고, 돈이 많고, 마음이 편하고 육신이 건강하고, 남에게 덕을 베풀고, 잘 죽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오복이나 창세기에서 선언하는 원초적인 복은 내용상 같다. 돈이 있어야 하고, 사람 관계가 좋아야 하고, 자식들 많아야 하고, 지위를 얻어야 하고, 일이 잘 풀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사형통이 최고의 복이다.

 

그로부터 500년 후, 출애굽 시대로 가면 복의 개념이 약간 달라진다. 신명기에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복의 내용은 창세기와 유사한데 다른 점은 복에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규례를 잘 따르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선한 일들을 행하라.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은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이른바 순종하면 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는 신명기 신앙관이 지배하게 된다.

 

또 다시 500년의 세월이 흘러 솔로몬 시대에 이른다. 시편을 비롯한 잠언과 전도서와 욥기라는 지혜서들이 등장하는 시대다. 하나님께만 잘 순종하면 자녀, 건강, 장수, 재물, 명예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따랐는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에 대해 회의가 든다. 세상 현실을 보니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악하게 살아도 창세기가 약속한 복들을 훨씬 더 많이 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어쩌면 세상에서 잘 되고 재물이 많은 것이 꼭 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다.

 

지혜서는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전도서를 보면,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복되고, 이들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한다. 욥은 노골적으로 고백하기를, 복을 바랬는데 화가 왔고, 빛을 기대했는데 흑암이 임했다고 말한다. 잠언에 나오는 현자 아굴의 기도를 보아도 그렇다.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기를 기도한다. 부한 것이 복인데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두렵다는 것이다. 물질의 복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지혜서의 대표라 할 시편은 아예 1편부터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버린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명예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신앙이 자리를 잡는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 창세기에서 말하는 원초적인 복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건강하고, 마음 편하고, 오래 살고, 돈 많고, 잘 죽을 수 있을까? 자식들 많이 낳고, 땅과 돈이 많고, 명예와 권세를 누리고, 모든 인간관계가 좋아서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잘 풀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사시사철 모든 일에 형통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것을 예수님도 생각해 보신 것 같다. 이런 식의 복은 첫째 눈에 보인다. 겉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둘째, 사람마다 편차가 너무 심하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다. 셋째, 한 사람에게 이런 복들이 동시에 주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

 

예컨대, 일복은 많은데 건강의 복은 없거나, 인복은 좋은데 물질의 복이 없거나, 자식복은 많은데 일복이 없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세속의 복은 상대적이고 계산가능한 차원이다. 상대적이라 함은 비교된다는 뜻이고, 비교된다는 것은 곧 열등감에 빠진다는 의미다. 물질의 복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돈 없는 사람은 열등감에 빠지고, 건강한 사람들 앞에서 아픈 사람들은 화가 나고, 자식들 잘 된 집 사람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시기심이 일어난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박복’이다. 나는 복이 지지리도 없다. 나는 이러 저러한 복이 없다며 계산하면서 탄식한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축복보다 없는 복에 주목한다. 그래서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다. 감사와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맥을 빠지게 하는 게 구약의 복이고 세상이 말하는 복의 개념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뒤집으셨다. 이른바 팔복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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