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와 이웃
【갈릴리 예수산책】 원수와 이웃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폭력을 당할 때 보복의 주체를 하나님께 맡길 것을 촉구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음 주제로 넘어가시는데,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신다. 43절은 여섯 개의 반대명제(안티테제)에서 마지막이자 최종 결론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옛날에 회당에서 배울 때 서기관들이 이렇게 가르쳤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그런데 사실 이런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도 없는 말씀이다. 지금 예수님은 모세율법을 놓고 반박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모세 율법 자체를 건드린 게 아니다. 오히려 회당에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잘못 가르쳐서 왜곡시킨 것들을 지금 바꿔주시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도 없는 말이다.
모세율법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에 만든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뻔뻔스럽게 왜곡을 했다. ‘원수’라는 말을 첨가해서 집어넣고 나서 다음에 ‘미워하라’는 말을 넣었다. 그리고 모세오경 레위기에 나오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말씀에서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빼고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만 남겨놓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웃은 오직 유대인이다. 여기에다 우리의 이웃이 아닌 사람은 누구냐? 그들은 이방인이요, 이방인은 원수이며,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것으로 확장한다. 왜냐하면 모세율법의 최종목적이 거룩인데, 거룩이란 구별이자 분리이며, 나쁘게 말하면 차별이다. 자신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과 구별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지금 바리새인들은 이방 문화와 섞이지 않기 위해 그들을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을 넘어 아예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이다.
실제로 모세율법을 자세히 보면, 이방인들한테 잘해주라고 가르친다. 나그네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너희 공동체 안에 들어 있는 거류민들, 이방 사람들, 고아와 과부에게 똑같이 잘 해주라고 모세율법은 강조한다. 왜냐하면 너희도 애굽에서 그런 처지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한 번도 모세오경은 이방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을 바꿔버린 것이다. 심지어 원수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라고 했지, 원수를 그냥 굶기라고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원수가 만일 소를 잃거나 길을 잃거나 하면 찾아주라고 한다. 모세율법의 기본 정신이 그렇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모세율법의 정신을 뛰어넘어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기도하라”고 까지 촉구하신다. 그 이유를 45절에서 밝히신다. 매우 파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왜 원수를 미워할 수 없는가?”, “왜 너희에게 박해하는 사람, 악한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는가?” 하나님은 해인데, 그 해에서 나오는 빛은 의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똑같이 비추고, 하나님은 하늘의 구름이신데, 거기서 내리는 비는 악인과 의인에게 똑같이 내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