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즐겨 쓰신 ‘아바’는 아빠인가?
【갈릴리 예수산책】 예수와 아버지
예수님이 즐겨 쓰신 ‘아바’는 아빠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아버지’ 호칭은 기독교의 신관이 되었다. 누가 뭐래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버지다. 세상에 이런 파격적인 신관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느 종교가 자신의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너무나 인격적인 호칭이고, 친밀한 이름이며, 가족적인 하나님이다.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오신 것 같다. 만군의 하나님이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너무나 멀고, 창조주 하나님은 그보다 더 멀고 막연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머리에 쏙 들어온다. 그림이 그려진다. 친근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건방져도 될 것 같은 이름이다.
기독교는 살짝 한 발 더 들어가 버렸다. 최근 20세기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그 친밀함이 극을 달렸다. 독일의 신학자요 어린 시절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요아킴 예레미야스 박사의 해석이 ‘아빠’ 신학에 불을 질렀다. 그는 마가복음음과 바울서신에 나오는 ’아바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아바(abba)’를 영어의 ‘아빠(daddy)’로 번역했다. 즉 예수님이 부르신 ‘아바’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 부르는 이름 ‘엄마’, ‘아빠’의 그 아빠라는 것이다. 인간이 최초로 부르는 원초적 이름이요,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가장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이며, 무엇을 요구해도 두려울 것 없을 이름이며,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 풍성함의 이름이다. 예레미야스는 예수님이 이처럼 하나님을 어린아이가 아빠를 부르는 것처럼 불렀다고 해석했다.
그의 영향은 대단하여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아빠’ 신학을 강단에서 외쳤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하나님과 친근하게 사귈 것을 가르쳤다. 당시 아버지라는 이름은 결코 친근함의 상징이 아니었다. 당시는 가부장제 사회였고, 집안에서 아버지는 자녀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최고 권력이었으며, 자녀들에 관한 한 부권은 국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런 시대에 아버지 호칭은 여전히 왕이나 군대의 사령관 못지않는 권위자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보다는 ‘아바’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아버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곧 반박되었고, 자신도 이를 정정하기에 이른다. 알고 보니 예수님이 쓰신 ‘아바’는 아이들이 쓰는 호칭이 아니라, 당시 아람어를 쓰는 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라는 것이다. 가끔씩 신학계에서는 이런 해석오류의 해프닝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것이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일 뿐이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을 사울이라 소개하고, 헬라 세계에서 선교할 때는 바울이라 소개했을 뿐이다. 해외에서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름 두 개 정도 쓰는 것은 기본이다.
마찬가지로 ‘아바 아버지’ 해프닝도 그렇다. ‘아바’는 아람어의 아버지이고, ‘파테르’는 헬라어의 아버지일 뿐이다. 마가가 ”아바 아버지여“라고 표기할 때는 예수님이 원래 쓰셨던 아람어의 발음을 소개해 준 것이다. 거기에다 헬라 독자들을 위해 ‘파테르’를 같이 써준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바울이 누구인가? 이스라엘과 헬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던 국제적인 인물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사람이었다. 선교사 바울은 예수께서 원래 쓰셨던 아람어의 ‘아바’와 선교대상자들의 언어인 헬라어의 ‘파테르’를 같이 써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신 아버지 호칭에 담긴 친근함과 사랑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호칭은 누가 뭐래도 ‘아빠’다. 아빠 하나님은 건방져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과 내가 아주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일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