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상관없을 것 같은 예수의 모습 - 2
갈릴리 예수산책 – 예수와 정치 3
정치와 상관없을 것 같은 예수의 모습 - 2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체포되는 순간, 지금껏 졸던 베드로가 갑자기 칼을 꺼내어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려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 또한 비정치적 모습을 보여준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폭력으로 세운 나라는 폭력으로 무너진다. 정치적 권력은 정치적 권력으로 무너져 내린다. 비록 자신의 죽음이 정치적인 판 위에서 이루어지고 계심을 아셨지만, 결코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이다. 만일 예수님이 살고자 하셨다면 얼마든지 정치적 타협은 있었고, 심지어 무리를 선동하고 규합하여 세력화할 기회도 충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칼을 쓰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비정치적 대응으로 자신의 길을 가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빠뜨리기 위해 던졌던 질문도 그렇다.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아니한가? 당신의 입장을 밝혀 보라. 당시 로마제국 지배하에서 세금문제는 제국이냐, 조국이냐를 놓고 선택해야 할 정치적 입장의 문제였다. 세금을 내면 조국에 배신자와 매국노가 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 제국에 반역자가 되어 실형을 살게 된다. 누가 보아도 정치적 이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하심으로 정치 프레임에서 빠져나가셨다.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으로 풀고, 종교적인 것은 종교적으로 해결하라. 훗날 이 말씀은 정교분리의 신학적 단서가 되고, 어거스틴과 루터에 의해 깊이 논의되었으며, 오늘날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정할 때 가장 기본적인 성서적 근거로 자리 잡았다. 아무튼 예수님은 자신을 정치적 프레임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시도를 차단하셨고, 자신이 정치적 인물로 보여지고 해석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비정치적이시기를 원하셨고, 또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준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 제자가 되어 따르겠다고 자청하는 서기관에게 던지신 말씀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얼핏 보면, 자연을 빗대어 하신 비유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철저한 정치적 메시지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 여우는 헤롯 안디바스의 별명이었다. 예수님은 헤롯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에게 왜 자신의 행보를 헤롯과 비교하셨을까? 예수 자신의 길은 헤롯의 길과 다르다는 것 아닌가? 헤롯과 같은 정치적 인물은 집이 있다. 집이란 안정감과 보호의 상징이다. 헤롯 같은 정치적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세력과 군사력으로 자신의 정치적 안정과 보호를 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자는 어떠한 정치적 안전 장치 하나 없이 떠돌다 갈 존재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현재 모습이 비정치적 노마드(유목민)로 살고 있음을 밝힌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정치적 안정감과 권력의 허상을 찾으려는 자원자를 물리치심으로써, 자신은 철저히 비정치적 개인으로 살다 갈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정치의 세계를 죄악시하지는 않으셨으나, 본인 자신은 그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셨음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