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 선포하시다
갈릴리예수산책 : 예수와 돈
돈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 선포하시다
예수님은 예배 때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데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져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기부금이든 십일조든 하나님의 정신이 들어가야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진 채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에서 알 수 있듯이, 오백원 정도를 내는 그녀가 드린 돈이 20만원 드린 사람보다 많은 이유는 전부냐 일부냐의 문제다. 전부와 일부의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마음의 차이다. 전부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일부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기부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돈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하셨을까?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시면서 돈의 핵심적인 속성을 드러내신다. 돈 버는 맛이 세 가지 있다는 것이다. 모으는 맛, 늘리는 맛, 누리는 맛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돈을 모았고, 확장했고 내 영혼을 여기에 쉬게 하리라 하면서 돈을 누리는 맛을 보길 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말은 돈을 누리는 시점에 임한다. 물질의 세계에 영혼을 눕히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온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란 바로 자기가 번 돈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사람이다. 돈에 자기의 영혼을 눕히고 자기를 위해 쌓아둘 줄은 알아도 하나님을 위해 돈을 쌓아둘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바보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일갈하신다. 자기 자신에게는 부유(wealthy)하지만, 하나님과 타인에게는 부요(rich)하지 못한 자의 끝이 그렇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만난 자리에서도 역시 돈 문제를 들고 나오신다. 예수님께 영생이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며 찾아온 엄친아 청년에게 예수님은 대뜸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형이상학적 대답을 기대했던 청년은 형이하학적 명령에 충격을 받는다. 청년은 자신이 가장 집착하고 숭배하는 것이 돈인 줄 몰랐다. 예수님은 그의 허를 찌르셨던 것이다. 자신의 돈을 누군가에게 거저 준다는 것은 그의 삶에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는 번민하며 돌아갔다. 돌아가는 청년의 등을 향해 예수님은 천국은 저런 자들을 절대로 받아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 부자 청년 또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의 영혼을 돈의 세력으로부터 분리하지 못한 자다. 그만큼 인간이 돈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돈에서 해방한 사람도 나온다. 바로 세리장 삭개오다. 그의 이야기는 부자청년 다음에 바로 이어서 나온다. 부자 청년과 달리 삭개오는 평생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산 사람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잘난 척하며 접근한 것과는 달리 삭개오는 얼굴이나 한번 훔쳐보자는 마음이었다. 부자 청년이 율법에 있어 영생에 가까운 사람처럼 자신을 여긴 것에 비해, 삭개오는 자신이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차이는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진지하지 못했고 삭개오는 지극히 진지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다가 예수님께 발견되었고, 예수님이 그를 불렀고, 그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나아가 예수님과 동네 사람들 앞에서 양심 선언을 한다.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며, 만일 부당하게 세금을 걷은 것이 있다면 4배로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을 예수님은 놓치지 않고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신다. 돈의 세력에서 분리되는 순간이 곧 구원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