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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언어 행위와 언어 철학에 관하여
갈릴리 예수산책 : 언어편 - ①
예수의 언어 행위와 언어 철학에 관하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첫 머리에서 팔복을 선언하시면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복이란 좋은 말이다. 어떤 사람을 향해 축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고 긍정하고, 그 사람의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매우 좋은 언어 행위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축복하셨고, 아프고 병든 자들을 위해 위로했으며, 배고픈 수천 명의 무리를 위해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기적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복을 사람들에게 빌어 주셨다. 제자들에게도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항상 그 집이 평안하기를 빌어주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엄청난 화를 쏟아붓는 독설가의 면모도 보여주셨다.
이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늘에는 경계가 없지만 이 땅에는 경계가 있다. 경계란 내 편과 네 편, 이쪽과 저쪽, 좋음과 나쁨, 선과 악, 복과 화로 나누어지는 구분을 뜻한다. 하늘에는 이런 경계가 없지만, 땅으로 내려오면 어디를 가도 존재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이다. 그러나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사랑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현실을 사셨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경계가 없는 우주적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3년 동안 사역하시는 동안 세상 속의 예수님은 수많은 경계에 부딪히셨다. 그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언어 행위를 보여주셔야 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부자를 사랑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표현이 다르셨다. 부자에게는 경고와 비판의 언어를, 가난한 자에게는 위로와 용기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위선적이고 교만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독설과 저주의 언어를 자주 쓰셨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약자들에게는 복을 선포함으로써 그 사랑의 양상을 달리했다. 권력가 헤롯 안디바스를 향해서는 거침없이 ‘여우’라고 대놓고 놀리셨지만,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모두가 죽이려고 할 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품으셨다. 반대로 예수님을 두고도 사람들은 항상 두 개의 편으로 갈라졌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편과 싫어하는 편, 예수님을 따르는 편과 예수님을 배척하는 편으로 항상 나뉘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시골 촌놈 정도로 무시하는 사람들로 갈렸다. 어쩔 수 없는 지상에서의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언어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복의 언어와 화의 언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양태가 모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복이 있는 자여!” 어떤 이들에게는 “화 있을진저!”
특히 화를 선포하실 때 나오는 예수님의 독설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하다. 예수님도 욕을 하셨는가? 하셨다. 그것도 아주 잘 하셨다. 당대 최고의 욕 “독사의 새끼들아”를 자주 쓰셨다. 거침이 없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입을 주목하게 된다. 과연 예수님의 언어는 어떤 식으로 발화하는가? 예수님의 입은 고운가 거친가? 예수님이 욕도 하셨다면 그분의 평소 언어 행위는 어떠셨을까? 말씀하시는 습관 같은 것이 있었을까? 말하기 어려운 것을 돌려 말하는 스타일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장 생각하지 않고 던지는 돌직구 스타일인가? 예수님의 언어 행위에 어떤 원칙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언어철학을 가지고 계신가? 이번 편에서는 복음서에서 언어에 대해 예수님이 갖고 계신 생각과 철학을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