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그 스승의 그 제자들이었다
결국에는 그 스승의 그 제자들이었다
모든 제자에게는 제자도라는 것이 있다.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9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원하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거처할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셨다. 제자도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란 내가 자원하는 게 아니다. 불러서 따라가는 것이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적극이 아니라 소극이다. 불러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부르심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불교는 출가, 곧 찾아감의 종교다. 그러나 기독교는 소명, 곧 부르심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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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두 사람이 마음에 드셨는지 제자로 부르신다. 그런데 한 사람은 아버지 장례 때문에 미뤄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은 가족과 작별인사할 시간 좀 달라고 한다. 순종의 문턱에 걸린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부르심을 접으신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안 된다 하신다. 순종이란 즉각적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자기 부정이 쉬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간단한가? 좁은 문이 좋겠는가?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70명에서 12명으로 줄었고, 그 12명조차도 예수님과 동상이몽이었다. 각자의 욕망은 서로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매일 싸웠다. 스승을 중심으로 좌우정 우의정 자리에 골몰했다. 결국 그들은 스승을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부활의 목격이다. 우리 말에 “그 스승의 그 제자”라는 말이 있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길을 따랐다. 가롯 유다만 빼고 모두 순교했거나 순교에 가까운 고난을 받았다. 그것도 예수님의 고난에 버금가는 죽음들을 당했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은 최초의 제자다. 빌립은 채찍에 맞아 감옥에 갇힌 후 AD 54년 십자가에서 죽는다. 마태는 유대지역과 에디오피아에서 사역하다가 AD 60년 파르티아에서 목베임을 당한다. 작은 야고보는 94세 때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에 맞아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한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지금의 터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스 파트레에스에서 십자가에서 죽는다. 오늘날 안드레는 그리스 정교회 1대 총대주교로 인정받고 있다. 베드로는 AD 64년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다. 베드로는 로마 가톨릭의 1대 교황으로 받들어진다. 두 형제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추춧돌이 된 것이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산채로 살껍질을 벗기우고 목베어 죽임을 당한다. 열심당원 시몬은 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와 영국에서 선교하다가 AD 74년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으로 몸이 관통되는 죽음을 당한다. 작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페르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 AD 72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순교하지 못한 제자가 바로 요한이다. 그는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예수님 사후 어머니 마리아를 섬겼고, 온갖 환난과 핍박을 견디며 요한계시록을 쓰고 에베소교회를 지켰던 마지막 제자다. 형은 최초의 순교자로, 동생은 끝까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역사에 남긴 기록자로 살다가 갔다.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스승의 그 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