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 마태를 부르시던 날
세리 마태를 부르시던 날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6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나서, 전혀 다른 색채의 제자를 일곱 번째로 부르신다. 그가 바로 마태이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그 마태다. 모세와 아론이 속한 레위 지파였던 그의 직업은 세리다. 세리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셋이 있다. 매국노, 부자, 그리고 죄인이다. 식민통치 시대에 자국민의 세금을 걷어 로마제국에 갖다 바친다 하여 매국노라 불렸고, 제국과 본토인들 사이에 토색이라는 방법으로 이윤을 가로채 자신의 주머니를 채운다 하여 부자라 했으며, 이 둘을 일컬어 죄인이라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3대 죄인을 일컫는 말이 있었는데, 이방인, 매춘부, 그리고 세리였다. 마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매국노라는 차가운 시선은 있었지만 나름 경제력도 있고 해서 제자로 들어가자마자 예수님께 식사 대접을 크게 한다. 물론 이 식사로 인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공개적 비난을 받는다.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바리새인들의 노골적인 비난은 이른바 “죄인논쟁”으로 비화했고, 그 바람에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만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의사가 살아갈 이유가 환자 치료이듯,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갈 이유는 죄인 구원이다. 기가 막힌 예수님의 대답에 바리새인들은 2차 공격을 시도한다. 예수님의 식사를 문제를 삼는다. 그것도 기분 상하게 세례요한과 비교하면서 말이다. 세례요한과 제자들은 금식을 잘하던데, 어찌하여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은 손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포도주나 마시는가? 이른바 “금식논쟁”이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너무나 잘 드시고 잘 마셨다.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다시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신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의 요지는 이렇다(마 9:15). 내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은 결혼식 잔치 같은 시간이다. 잔치에서 금식하는 사람은 없다. 잔치 집에 가서 금식하면 얄밉다.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신랑이 떠날 날이 올 텐데, 그때는 슬피 울며 금식할 것이다. 자신이 걸어가실 길을 암시한 대목이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두 기간으로 나누어 이해하신 듯하다. 공생애 활동의 시간과 십자가 죽음의 시간으로, 공생애 잔치의 시간과 십자가 금식의 시간으로, 그리고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과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떠나는 시간으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금식은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모세오경 어디에도 금식을 정해놓고 하라는 명령은 없다. 금식은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정해져서 꼭 해야 하는 제의적 규범도 아니다. 특히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종교적 경건을 보이는 외식적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런 금식은 너무나 역겹고 천박스러웠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비판하시겠지만, 그런 금식이야말로 예수님이 가장 혐오하는 종교적 위선이었다. 예수님의 금식은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운명 앞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끝으로 겟세마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랑이 떠나가는 날 우리의 금식은 시작된다. 금식은 음식이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프고 간절할 때 하는 특별한 영적 행위어야 한다.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신 일이 바로 마태를 부르신 그 날이었다.